[리뷰] 김예림 EP 『A Voice』(2013)


김예림 EP 『A Voice』

2013. 미스틱89


음악을 주고픈 목소리


이소라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밋밋한 프레이즈만으로도 순간 멈칫하며 스피커 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호소력, 플랫과 샵의 경계를 오묘하게 넘나들며 조금은 불편한, 뜻 모를 긴장으로 머뭇거리게 만드는 음처리, 언뜻 들어본 듯 뻔한 것 같으면서도 거부감을 허락지 않는 발음, 발성, 그리고 목소리의 결. 그런게 닮았다. 그런데 이런 게 어떻게 열심히 가르쳐서 되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기술이라면 얼마나 공평할까.


마술과도 같은 곡을 맞춤 핏으로 선사한 윤종신, alright의 반복되는 굴림소리가 곡이 끝나고도 한동안 귓가에 잔상처럼 남는 이상한 기분은 과연 음악의 힘이다. 조심스럽지만 영리한 프로듀서인 그가 불러모은 신재평(페퍼톤스), 조휴일(검정치마), 이규호, 정준일. 더 나은 라인업을 음덕인 나라면 만들 수 있을까.(정순용, 권순관, 김용린, 정바비라면 또 어떤 색을 끌어낼 수 있을까?) 이들의 특징은 그들이 가진 완전한 개성에 비해서는 목소리 위해 군림하지 않는다는 것. 편곡과 목소리 사이에서 작위적인 경계가 만져지지가 않고 그저 주욱 앨범 전체가 흘러간다. 좋은 호흡이다.


60년대의 리듬과 복고적 하모니가 지배하는 “캐럴의 말장난”을 기점으로 이 짧은 EP는 그 본연의 색을 더 깊숙이 드러낸다. 감각적인 첫 느낌만큼이나 들을 때마다 신선한 세련미와 깊이가 장점인 이규호의 곡은 역시나 가장 이질적이지만 정규 앨범을 위해서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앨범의 베스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김예림의 모노크롬적인 담백한 프레이징에 더없이 어울리는 그 진폭이 크지 않은 얼개를 가진 곡. 단속적으로 올라가는 고음을 빼고 힘빠지듯 끝음을 처리해 스산한 가사의 스토리를 더없이 완벽히 전달하는 능력은 탁월한 감수성의 증거. 정준일이 언젠가 김예림의 목소리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에 필적하는 곡을 감히 쓸 수 있기를.


글을 쓰는 사람의 한계. 턱을 괴고 상상만으로는 모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이 답답함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건 이 음악가들은 이 새롭고 참신한, 복잡미묘한 뉘앙스의 색채감이 풍겨나는 이 목소리에 흥분하고 있다는 것.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음악을 쓸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그 이미지는 어떻게 소리로 구현이 될까. 그들이 즐겁게 궁리하고 결과물에 흡족해 하는 스튜디오 안의 모습을 소리로 확인할 수 있었다면 억지일까. [2013.7.10]





김영대(투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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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박 『Inner Child』(2013) MusicY Critique

Inncer Child | 존박(John Park)

2013. 뮤직팜/로엔엔터테인먼트


고민의 흔적


데뷔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완숙미가 인상적이다 못해 다소 의아할 정도였던 [Knock]의 수록곡들, “왜 그럴까”와 “그 노래”가 전해준 잔향이 아직 남아 있다. 미니멀한 편성의 피아노 혹은 기타 위로 유영하던, 오랜만에 만나는 “자기 목소리를 가진” 세련미에 소름이 돋았던 건 비단 필자 뿐만은 아닐 터. 심지어 "Falling"에서는 근 몇 년간 국내외 어느 쪽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독특한 팔세토 톤을 구사하며 그의 음역대에 대한 우려를 가졌던 이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쥐어짜는 고음이나 서커스적인 테크닉 없이도 스토리를 풍부하게 전개시키는 능력의 비범함, 나에게 그의 데뷔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보컬리스트의 발견 그 자체였다.


문제는 그 예외적인 보컬 컨트롤이 어떤 의미에서는 보폭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점. 다소 어덜트 컨템포러리에 가깝게 설정된 (아마도 멘토인 김동률의 전반적인 프로듀싱에서 유래했을) 차분한 톤도 그 자체로 문제는 없었지만 혹시 너무 이른건 아닐까도 생각했다. 기성 가수 그 누구와 견주어도 딱히 모자랄 것이 없는 아 ‘완성된’ 톤은 질리지 않고 어떻게 더 변주할 수 있을까? [Inner Child]를 켜며 내 관심은 그곳에 머문다.


섬세한 보컬톤보다는 리듬감에 의도적인 방점이 찍힌 두 곡 “Imagine"과 ”Baby"이 연이어 귀를 두드리면 불안했던 마음이 일소된다. 전작에서 힌트도 주지 않던 acid 계열의 funk와 컨템포러리 알앤비를 앞세워 정면돌파, 동어반복의 우려를 일단 가뿐히 걷어낸다. 상쾌하다. 타이틀로 내세운 “Baby"는 이미 90년대 내내 소위 ”뮤지션“들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 건드려봤던 편곡이지만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그루브를 가지고 논 보컬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곡들에서 그의 목소리는 소위 해외파라 불리는 사람들이 종종 들려준 ‘맥락일탈’의 낯설음이나 국내파들이 종종 맞닥뜨린 어정쩡함의 경계를 좋은 의미에서 넘나들고 있다. 한국에서 듣기 힘든 독특한 톤이지만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은 미덕이다.


이적은 그렇다고 쳐도 이상순이나 이승열, 심지어 정원영의 이름을 존 박의 앨범에서 만나다니 우선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음악을 듣고 나니 그 나름대로 수긍이 간다. 장르와 스타일, 편곡의 지향점은 제각각이지만 존 박의 보컬이 가진 최대의 미덕인 ‘관용성’ 안에서 제법 위화감 없이 엮여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물론 기교는 흠잡을데 없다. "Too Late“를 예로 들면 엄연히 록적인 지향속에서도 소울에 기반한 유연한 발성을 무기로 멜로디에 따라 톤의 다채로운 변화를 통해 묘한 공간감을 이끌어 내는데 이는 카피캣 보컬리스트들과는 다른 차원의 보컬이다. 전작에 비해서도 확실히 능숙해져있다.


“Right Here"에서 느껴지는 조금은 촌스러운 90년대 뉴잭의 뉘앙스, 리듬이 완전히 배제된 채 메시지의 투명한 감수성에 오롯이 집중한 정원영의 ”어디있나요“는 곡 그 자체가 아닌 앨범 전체의 일관성만을 고려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불협이라 지적할 만한데, 그래서인지 후반부와 보너스 트랙으로 밀려 있는(?) 일련의 자작곡들은 오히려 존 박 본연의 보컬색이 좀 더 자유롭게 발산되는 놀이터이면서 재즈와 소울에 기반을 둔 보컬리스트로서의 뚜렷한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안전장치처럼 느껴진다. 트렌디함이나 예리한 선율감은 아직 부족해보이지만 “싱어송라이터”의 자격을 위해 찔러보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결과물은 아니다.


문제는 존 박이라는 재능을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숙제는 두 장의 앨범을 통해서도 아직 완전히 만족스런 답이 얻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Inner Child]는 욕심보다는 고민의 흔적이 담긴 한 장이다. 톤, 기교, 발성등 기본적인 보컬리스트로서의 매력은 지난 앨범에 비해서도 확실히 성숙했다. 그러나 장르 보컬리스트로서의 존 박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보컬이 아닌 프로듀싱의 영역에 더 가깝다) 몇 개의 단어로 “이런 음악”이라 정의할 만한 정도의 일관성은 여전히 부재하지만 신뢰감 있는 선배들이 그 나름의 개별적인 색을 책임지고 있는 와중에 존 박은 예의 그 탁월한 유연성과 장르 소화력으로 응수한다. 단순히 백화점 식으로 늘어놓는 다는 느낌보다는 장르와 변신, 본연의 색깔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이 읽힌다. 어떤 의미에서건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참여한 면면의 무게감만큼이나 공을 들여 다듬어 냈겠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없는 프로듀싱의 섬세함, 장르를 타지 않고 그 어떤 음과 리듬을 막론하고 자신의 톤으로 끌고 오는 보컬의 존재감, 더불어 음악의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한결같이 녹아나는 진지함까지. (앞으로 좀 더 유연해도 좋지 않을지?) 대중적인 성패를 떠나서 이미 그는 실패하기 어려운 커리어의 궤적에 진입중임에 분명하다. 고유한 서명을 가진 목소리라는 것은 또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부러움을 살 재능인가. 새로운 세대의 이문세나 이승환은 꼭 발라드 가수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농담을 섞어 말한 기억이 난다. 두 앨범을 통해서 드러낸 감수성이 이 정도라면, 아마도 존 박은 그 유력한 후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3.7.8.]




김영대(투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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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환호와 냉소 넘어 문화적 상상력 깨우다 (시사저널) MusicY Critique

미국에서 바라본 싸이와 '강남스타일'의 마력
환호와 냉소 넘어 문화적 상상력 깨우다 / "앞으로의 상황은 아무도 예상 못 해"
김영대 (대중음악평론가/음악학자)
시애틀

“대단히 매혹적인 노래입니다. 단순히 말춤이 전부가 아니죠. 어느새 후렴구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한국어를 몰라도 가사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분명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트렌디한 음악이라는 점입니다.”

한 로컬 DJ가 전해준 <강남스타일>에 대한 촌평을 되씹으며 차를 운전한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는시애틀의 워싱턴 주립대 주변 대학가로 빠져 나오자 어디에선가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다름 아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수많은 인종이 뒤섞인 미국,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강남스타일>
은 가요가 아닌 ‘팝’이다. 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제도권 방송국이 앞다투어 이 노래를 선곡 리스트에 올려놓고 학교에서는 밴드 합주곡으로, 팀 응원가로, 개강 파티의 춤곡으로 <강남스타일>을 즐긴다는 소식도 접한다. 미국 유학 생활 5년 만에 처음 겪는, 실로 기이한 경험이다.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조회 수 3억건을 돌파하고, 음악팬의 숙원(?)과도 같던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오르며 단번에 정상마저 정조준한 지금, 어디를 가도 싸이와 <강남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들뿐이다.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매일 관찰되는 이런저런 반응 역시 한국에서만큼이나 뜨겁고도 생생하다. 예상대로 그중에 누군가는 환상을, 또 누군가는 회의적인 시선을 더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담론은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한 구조 안의 서로 다른 층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그 둘을 가로지르는, 그 이야기를 뛰어넘는 변증법적인 전망은 가능할까? 싸이와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호사가의 평가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의 ‘바람’,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일까?

지난주, 유명 코미디언이자 연기자인 지미 팰런의 토크쇼 <Late Night With Jimmy Fallon>에서 싸이를 도마에 올렸다. 팰런이 초대 손님으로 나온 래퍼 아이스티에게 싸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굳이 한마디를 유도해낸 것이다. 1980~9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래퍼이며 평소 독설로도 유명한 그가 싸이의 사진을 보며 환호하는 방청객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냐”라며 일단 찬물을 끼얹더니,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말춤의 열풍을 팰런이 재차 강조하자 곧바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래퍼일 뿐이다.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내가 음악 산업을 진작에 떠난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코믹하지만 냉소적인 어조로 <강남스타일>을 순식간에 깎아내려버린다. 사실 <강남스타일>의 예상치 못한 열풍을 짐짓 못마땅하게 보는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비판이다. 내용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아시아 음악이 버젓이 차트 정상을 노리고 있는 것에 대한 푸념이라면 푸념이다. 말춤은 ‘우스꽝스러운’ 춤일 뿐이며, ‘수준 낮은 음악’에 열광하는 대중의 수준 역시 함께 격하하고픈 의도도 읽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우스꽝스러움’이야말로 미국이 발명해내 전 세계로 퍼뜨린 B급 코미디의 전형이며,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음악적인 기교는 대중성을 최대의 미학으로 여기는 대중음악의 필수 불가결한 특질이라는 것은 아이스티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터.

일부에서는 비관적 시선도 드러내

그의 독설이 전파를 탄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경쟁 방송국 ABC의 Jimmy Kimmel 라이브 쇼에는 보란 듯이 싸이가 특별 무대에서 청중과 함께 말춤을 추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빌보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홈페이지를 통해 싸이의 빌보드 정상 도전기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며 이례적인 관심을 할애한다. 냉소와는 전혀 거리가 먼, 관심 섞인 놀라움의 발현이다.

일상의 영역에서 관찰되는, 갑작스러운 싸이의 부상과 열풍을 바라보는, 조금은 차분한 시선들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특히 미국 현지인이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교포 커뮤니티에서 들리는 증언은 제법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K팝은 굉장히 멋있고 세련된 음악이라고 다들 알고 있었어요. 사실 그래서 좋아했고요. 하지만 빅뱅이나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는 다른 나라 친구들이 싸이의 코믹한 춤이나 노래를 보고 멋있어 할 것 같진 않아요. 조금은 창피해요.” 평소 K팝의 열렬한 숭배자임을 자처하는 이 학생의 솔직한 증언은 YG의 수장 양현석의 “싸이의 성공은 K팝과는 별개로 놓고 보아야 한다”라는 의견과도 일정 부분 맥을 같이한다.  “(싸이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렇게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아요. 한국 뮤지션이라면 다 저런 춤을 추고 혹은 싸이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까 봐서요.” 한 교포 인디뮤지션의 이같은 발언은 영국 신문 가디언이 얼마 전보도한 “싸이가 뚱뚱하고 못생긴 아시안에 대한 그릇된 고정 관념을 오히려 강화할 우려가 있다”라는 비평적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싸이를 넘는 새로운 담론의 도래 가능성도

하지만 이 역시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그 자체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단절적인 시선에 불과하다. 사실 교포를 포함한 일부 한국인의 우려와는 달리 미국 대중의 시선은 오히려 그동안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문화적 주체로만 여기던 아시아인들이 보여주는 역동성과 동시대성으로 모아지고 있다. 며칠 전, 미국 <뉴요커>는 무려 15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해 K팝의 위상과 본질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쏟아냈다. 싸이의 급부상이 계기가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전통의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싸이의 초현실적 패션 이미지와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패션센스를 K팝을 읽는 중요한 코드로 거론하기도 했다. 일부가 걱정하는 회의적이거나 냉소적인 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이나 아시아권의 인기에 비해 정작 미국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2NE1이나 소녀시대, 샤이니가 싸이의 예상치 못한 대박과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K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애써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최근 방송에 출연했던 소녀시대 그리고 이제 싸이 덕분에 이렇게 다양한 음악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현지 음악인의 말 속에서 싸이와 <강남스타일>을 넘는 새로운 담론들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도 느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싸이 개인의 성공과 업적, 당장의 수치와 기록을 중심으로 쏟아내는 갖가지 논의가 앞으로 벌어질 더욱 흥미롭고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온전히 전망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후속곡으로 유력한 <라잇나우>가 <강남스타일>만큼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당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것이다. 빌보드 싱글차트의 다음 주 성적이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도 자명하다. 하지만 싸이와 <강남스타일>, 그 거짓말 같은 성공이 남긴 파급력, 궁극적 결말의 전모는 지금 단계에서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정식 앨범 발매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폐쇄적인 선곡 시스템으로 악명 높은 미국 라디오와 유색 인종에 인색한 TV 무대마저 점령했다. 정상의 문턱에 오르기까지는 3억명이 넘는 사람이 클릭한 유튜브의 뮤직비디오가 결정적이었고, 그 주체는 결국 보통의 ‘음악 대중’이었다. 

“싸이라는 개인, 그가 보여줄 미국에서의 성공 스토리는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요.” 필자의 은사이자 저명한 음악학자인 필립 스카일러 교수가 며칠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다시 귓가에 맴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다음에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그저 벌어지는 일을 목격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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